제철 해산물로 이색적인 요리에 샴페인을 더하는 하버
제철 해산물로 이색적인 요리에 샴페인을 더하는 하버
빛이 닿지 않아 완벽한 암흑에 가까운 심해. 깊이와 바닥을 알 수 없기에 언제나 미지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바다를 상징하는 푸른빛은 사실 수표면 부근일 뿐, 바다는 수심이 깊어질수록 막막한 밤을 닮아있다.
하버(Harbour)는 그 고요 속에 머문다.
하버는 당일 공수한 제철 해산물로 이색적인 요리에 샴페인을 더하는 캐주얼 다이닝 바다.
독특한 푸른 색감의 파사드, 그와 대비되는 무채색 내부 공간.
이곳은 매일 사람들로 북적이는 신용산 골목 풍경의 궤도에서 벗어난다.
바깥에서 훤히 보이는 개방적 공간이지만, 이색적인 내부 마감재와 특유의 빛 환경이 조성하는 몽환적 분위기로 은밀함이 공존한다.
꼴 스튜디오는 ‘깊은 바다, 깊은 시선(Deep Sea, Deep See)’이라는 키워드로 마치 심해 속에서 식사하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고자 했다.
전반적으로 톤이 어둡고 내려앉은 느낌의 내부 공간은 설계팀이 계획한 만큼의 조도를 보여주기 위해 의도한 바다.
매입등을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선내의 빛 환경에서 영감 받은 조명을 설치해 공간에 그윽한 정취를 자아냈다.
항구에 정박하기 위해 물밑으로 닻을 내리듯, 그 형태를 띤 출입문 손잡이를 밀어 열면 깊은 바다의 항구에 들어서게 된다.
좌우 폭이 좁고 긴 복도 형식의 목조 주택에는 천장을 가로지르는 대들보가 목조 선박의 굽어진 골조를 연상시키며, 공간의 중심축으로 무게감을 잡아준다.
대들보의 50년 전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여 설계에 반영했다
이곳을 이루는 핵심 요소는 모두 깊이 투영되거나, 반사되는 특징을 가진다.
해안에서 볼 수 있는 모티프를 도입한 것. 설계팀은 바다와 항구에서 볼 수 있는 요소를 차용해 직유로 드러내기보다, 다른 자재를 통해 은유할 수 있는 디자인 요소를 곳곳에 배치했다.
모래 바닥처럼 우둘투둘한 종석, 비늘을 연상케 하는 질감의 강제전선관, 벽 조명이 그런 요소들이다.
테이블 상판의 마감재 흑경은 검은색에 가까운 심해를 표현한다.
어느 자리에 앉아도 흑경에 천장이 반사되어 마치 어두운 바다에서 수면 위를 바라보는 듯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굴곡과 왜곡이 더해진 반사광은 수면 위를 부유하는 빛무리처럼 잔잔하게 일렁인다.
‘깊은 바다’가 디자인 요소를 관통했다면 ‘깊은 시선’은 공간의 레이아웃과 연결된다.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은 모두 동등한 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오픈 주방의 지반 높이를 다르게 계획해, 서서 작업하는 셰프와 앉아있는 손님의 눈높이를 맞췄다.
이는 둘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고, 셰프의 정성스러운 음식과 서비스를 부각하기 위함이다.
하버는 도심 속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이들의 항구가 되어준다.
꼴 스튜디오가 구현한 심해는 절대적 어둠이라기보다 고요와 광채가 조응하는 공간이다.
정성스레 건네는 매일의 해산물 요리, 좁고 긴 평면에서 주고받는 깊은 시선은 총체적 감각 경험을 선사한다.
네 번의 계절을 나는 동안 우리가 인지하는 햇빛의 모습은 지극히 변화무쌍하다.
예리하며 둔탁하고, 따뜻하며 차갑고, 선명하며 모호하다.
그중에 봄의 햇살은 시각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단연 편안한 인상을 준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삶이 가장 평온한 삶이라는 혹자의 말처럼, 봄은 인간의 예민한 오감을 적절한 수준에서 향유하게 해주는 평화의 계절이다.
계획에 없던 기차에 올라타게 된 그날도 봄의 기운이 충만한 날이었다. 기차라는 교통수단은 필자에게는 홀로 침잠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아이폰 메모에 깊숙이 숨겨져 있던 2년 전의 문장은 잠깐의 사색을 허락했다.
하얀 종이도 무늬의 일종이라면 가슴으로 메워라
이것이 에도시대(1603~1867)의 회화 기법서에 쓰인 문장이라 하니, 신통하다 표현하고 싶다.
까마득한 옛 시대의 디자이너가 추구하던 디자인의 본질도 지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문장은 단순히 비움의 미학이나 미니멀리즘을 신봉하는 글이 아닌 창조하는 자의 마음가짐에 관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KKOL Studio 식구들은 하얀 종이를 참 좋아한다. 하나도 둘도 아닌 셋이 다 그렇다.
본질만 남기고 불필요한 요소들은 철저하게 제거한, 기능의 심미적 경험을 쫓는다.
하얀 종이는 온전함 그 자체다. 온전함에서 오는 그 무한한 기운은 완전하기까지 하다.
그런 하얀 종이를 가슴으로 메우라 한다. 멋진 말이지 않은가? 이 문장이 유독 멋스럽게 느껴진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진정성”이었다. 공백지대(空白地帶)에도 진실한 의도와 의지를 담아 표현하라는 것이다.
밑 빠진 독에 무언가를 담으라는 이야기와 같이 들리니 얼토당토않은 소리라 생각할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담으라는 것이다. 혼자만이라도 담아 내면에 지니라는 것이다. 안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과 해석이다! 하지만 과도한 업무에 짓눌려 의미 없이 아름다운 선을 한 번이라도 내질러 본 사람이라면 고민해보았던 지점일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은 사람이, 사람과, 사람을 위해 하는 일이다.
그 노동의 산물에는 그 일을 행한 이들의 면면面面이 어떤 식으로든 묻어난다. 공간을 디자인하는 일도 다르지 않다.
공간은 만든이의 격格과 향向을 머금는다. 하지만 그 수준을 매번 만족스러운 궤도에 올려놓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온전함을 이룩하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걸림돌이 첩첩이도 많기 때문이다.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짐작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