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음으로 드러나는 집

비어 있음으로 드러나는 집

비어 있음으로 드러나는 집

힌스 한남 / hince 汉南 / hince Hannam

생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 단정한 집에는 갤러리의 서늘한 공기가 흐른다. 점·선·면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집 곳곳을 작품 감상하듯 천천히 거닐어본다.

거실과 인접한 방은 꼭 있어야 할 가구 몇 점으로 단출하게 꾸몄다. 수납력이 뛰어난 르네 장 카이유René-Jean Caillette가

디자인한 캐비닛은 오랜 빈티지 가구 애호가인 박선영 씨가 특히 좋아하는 가구. 묵직한 부피감으로 어느 공간에서든 남다른 존재감을 발한다.

거실은 시스템창으로 프레임을 최대한 깔끔하게 정리하고, 창 쪽으로는 가구를 두지 않았다. 파란 소파 앞에 서면 동네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지노 사파티 Gino Sarfatti 램프가 놓인 침실.

골목을 굽이 오르고 돌고 또다시 올라 다다른 종로구 누상동의 한 빌라. 이곳은 칼럼니스트 박선영 씨와 남편을 위한 집이다.

동네가 한눈에 담기는 창 밖 풍경 외에는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거실 공간으로 북동향 특유의 부드러운 빛이 스민다.

그제야 새하얀 벽의 주인공처럼 서 있는 가구와 그림이 보인다. “오전 시간은 대개 명상하듯 고요하게 보내요.

자연스럽게 이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그 시간이 아주 좋아요. 우측으로는 인왕산 자락이 완만하게 흐르고, 좌측은 북악산이 펼쳐지죠.

이상하게 매일 봐도 전혀 질리지 않아요. 어제보다 무성하고 짙어진 초록이 보이네요. 하루하루가 다르고,

아침과 오후가 또 다르죠. 이 집은 풍경이 다했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박선영 씨는 오래도록 서촌을 좋아했다. 구체적인 이사 계획을 세우고는 2년이 더 걸려 이 집을 만났다.

결혼 후에는 줄곧 아파트였지만

유년 시절에는 마당 있는 2층 주택에 살았다. 사춘기 때 틀어박히기 좋아하던 다락방, 불꽃놀이를 구경하던 옥상,

마당에 피어나던 장미와 목련. 이런 선명한 기억 덕분인지 자연을 가까이 들이는 집을 선망해왔는데 산을 품은 이 집 전망이 마음에 쏙 들었다.

집을 레노베이션해 고친 지 이제 한 달 남짓. 현관 앞 욕실 진입부에 가벽을 세워 수납장을 제작해 복도식 구조를 만든 것 외에는 특별히 바꾼 부분은 없다.

복도에서 오른쪽은 주방·침실·드레스룸의 프라이빗한 공간이, 왼쪽으로는 전면 창이 있는 거실과 큰방이 자리한다.

현관 왼쪽에 가벽을 세워 수납장을 짜 넣은 덕분에 복도형 구조가 만들어졌다.

화이트와 스테인리스 소재로 꾸민 최소한의 화장실.

선과 면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도화지 같은 실내 공간은 흡사 갤러리에 있는 듯한 공간감이 느껴진다. 형광등과 바 형태의 스테인리스 조명을 나란히 배치한 점이 눈길을 끈다.

“거실에서 손님과 차를 마시다가, 분위기를 바꿔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상황을 상상하며 이 방을 라운지로 만들었어요.

폴 매코브Paul McCobb의 큰 책상이 있어서 홈 오피스로도 유용하고, 작은 게스트 화장실도 딸려 있어요. 아직 이 공간에 어울리는 라운지체어를 찾지 못했는데, 그게 즐거운 숙제이기도 해요.”

84㎡의 평범하고 오래된 빌라를 지금 모습으로 바꾸는 데는 비어 있음으로 샤우스튜디오(@shawoostudio) 박창욱 소장의 공이 컸다.

유리공예 작가의 작품으로 작은 창을 낸 부엌문, 언뜻 보면 조형 작품처럼 보이는 주방 후드, 공간 속에 감쪽같이 숨은 벽 같은 가구는 물론,

각종 손잡이와 비디오 폰 같은 집기를 모두 커스텀 제작했다. 레노베이션의 모든 원칙은 원래 것을 최대한 살리는 것. 벽을 치는 대신 최대한 콘크리트 벽을 살려 면을

다듬고 그 안에 전선을 넣는 방법으로 새하얗지만 차분히 가라앉은 지금의 미감이 완성되었다.

상부장을 없앤 일자형 주방 공간에는 오직 이 공간을 위한 후드를 제작해 달았다.

도화지처럼 희고 말간 공간

이사한 지 이제 한 달 남짓이라지만 짐 정리가 덜 되었나 싶을 정도로 짐이 없다. 우선 빛을 가릴 블라인드나 커튼, 등을 받쳐줄 쿠션이 없다.

가족을 모이게 한다는 식탁 위로 늘어뜨린 펜던트 조명도 없다. 나란히 줄을 맞춘 형광등, 밤새 읽다 아무렇게나 덮어둔 책 한 권

놓이지 않을 것 같은 단정한 책상, 생활 가전을 완전히 숨긴 희고 말간 주방. 그러고 보니 생활감이 없다.

“과거 유럽은 벽에 태피스트리나 그림, 거울 등을 꽉 채워 권위나 부를 드러냈다고 해요.

그러다 20세기 모던 시대로 들어서면서 벽을 비워 지성을 표현하게 되었지요. 어떤 사람은 빈 벽을 보면 무언가로 채우고 싶어

불안해진다지만 저는 이 집을 레노베이션하면서 무엇을 더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비울 것인가를 내내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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