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 하만리에 위치한 청보리밭 창고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 하만리에 위치한 청보리밭 창고
퍼스트 치과 장소에 대한 감각은 미세한 알아차림에서 온다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단연 어렵지만, 이미 나와 있는 것을 고치는 일 역시 고통을 수반한다.
작가의 글을 한 글자씩 면밀히 뜯어보며 편집하는 일, 완제품인 옷을 리폼하는 일, 존재하는 건물을 개조하는 일들이 그렇다.
창조가 아닌 수선(修繕)이기에 어렵다.
본래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수선함으로써 더 나은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니까.
공간을 수선할 땐 설계부터 시공, 마감에 이르기까지 여러 작업이 필요하다. 먼저 예산과 클라이언트 선호도에 맞춰야 한다.
미학의 기준을 재정립하고 목표를 세운다. 이 과정에서 레이아웃과 재료 등을 고려해, 기존 형태를 유지한 채 어떤 변화를 줄지 청사진을 그린다.
즉 수선이란 새로운 ‘복원’의 개념인 것이다.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 하만리에 위치한 청보리밭 창고는 들바람이 불어오는 드넓은 청보리 언덕 위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가진 이 건물은 본래 사과 창고였다.
허허벌판에 청보리를 직접 심은 장본인이자 이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는 청보리 창고를 카페로 탈바꿈하려는 그림을 그렸다.
의뢰를 받은 ‘디자인짜임’ 설계팀은 공간 대수선 작업을 주로 담당해 오고 있다.
남해에 있는 돌 창고를 리뉴얼해 카페와 전시공간으로 만들었던 기억에서 이번 프로젝트 영감을 얻었다. 보령으로 내려가 청보리밭을 눈에 담으며 콘셉트를 잡아 나갔다.
수선에 특화된 설계팀이 택한 방식
허름한 건물에는 지나온 세월이 묻어 나오고, 주변은 오래된 교회만 있을 뿐 높은 건물 하나 없이 초록만이 고요히 펼쳐진 들판이다.
그들은 건물이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느낌과 이곳의 장소성에 집중했다.
이 창고를 인위적으로 뜯어고치고, 페인트로 전부 덧씌워 버리고, 가공해 버리는 것 자체가 주위 환경을 거스르는 일이라 여겼다.
그 결과, 청보리 창고의 원래 모습을 반영해 날것 그대로,
재료 본연의 색감과 질감을 구현했다. 폐허였던 공간은 그러한 대수선 설계 과정을 거쳐 확장되었으며 창고형 카페로 복원되었다.
‘재료 본연의 자질을 살린 디자인’이 메인 콘셉트였다.
창고 형태를 뒷받침해 주는 디자인에는 여러 요소가 있다.
건물의 옛 시간을 나타내도록 벽면 부분들은 톤을 맞춘 아트 페인팅으로 거칠게 칠해, 백 년 묵은 집 같은 느낌을 주었다.
외부에 쓰인 호피석을 내부 전면 카운터에도 끌고 들어왔다.
증축된 별채에서는 창고와 어우러지는 묵직한 금속 질감을 곡선형 좌석으로 처리해, 유연함과 무게감이 대비되는 효과를 준다.
특히 작업은 어려웠지만 그렇기에 포인트가 되는 부분은 메인 공간 천장이다. 기존 천장에는 대들보처럼 나무 트러스가 있었으나 40년 이상이 흐르면서 다 날아가 버렸다.
설계팀은 목재 트러스를 새로 만들어 이전 것과 지금 것을 최대한 함께 살리는 방향을 추구했다.
청보리 창고는 자연을 해치기보다 자연적 디테일을 복원해 공간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프로젝트다.
공간이 수선 ‘완료’되었으니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옛 건물의 모습도 함께 수선되길 바랐던 바람. 청보리 창고에 들어서면 곳곳에서 그 마음을 감각할 수 있다.
공간을 수선한다는 것
어렸을 때 고고학자들이 유물을 발견하고 복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작업이 의미 있게 느껴졌고 그게 직업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인테리어디자이너로 사십에 가까워진 시점, 공간을 복원하는 대수선작업이 정말 유의미한 작업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회사의 방향성도 고고학자와 같이 노후화된 공간을 새롭게 대수선 프로젝트에 전념하고 있다.
보령 청보리밭 창고는 22년 9월 지인의 요청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지인의 남자친구가 카페를 오픈해야 하는데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사진을 여러 장 보내 왔다.
사진에는 폐허에 가까운 낡고 허름한 창고가 찍혀 있었다.
‘여기에 무슨 카페를 하나요?’라는 의문이 단박에 들었지만 코로나 시절, ‘그해 우리는’ 드라마 촬영지라는 말을 듣고 그곳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것은 필요와 목적이 있어 존재하겠지’라는 생각에 현장 방문 일정을 정하고 프로젝트 윤곽을 직접 눈으로 그리기 위해 보령으로 떠났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시골 총각일 것이란 예상을 뒤집고 핸섬했다.
충청남도 보령시 축산업을 운영하는 자수성가형 CEO
그곳엔 나름대로 공사를 위해 목수, 조적공사 인부를 불러 이것저것 시도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일하시는 분들이 본인 말을 듣지 않아 공사를 포기한 상황이었다.
속으로 ‘어디 노가다가 그리 쉽게 되나요?’ 웃음 지었다.
그리고 젊은 대표의 꿈과 창고형 카페를 왜 만들고 싶은지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게 되었다.
현장에 도착해 한 바퀴 쭉 돌아본 뒤, 이 프로젝트가 옛 유물을 복원하는 작업과 같다고 생각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 당장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앞서 말했듯 이번 공사는 창고 본연의 모습에 요즘 콘셉트가 의미 있게 공존하는 프로젝트다.
‘새로운 공간 부활’이라는 콘셉트로 무엇보다 카페가 자리 잡은 주변 풍경과 어우러지도록 설계했다.
공간이 목표대로 부활하게끔 재료와 색감과 질감이 한 땀 한 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했다.
진통 끝에 공사는 설계대로 완성되었다.
청보리밭 카페는 오픈 후 SNS 핫플로 입소문이 났다.
심지어 KBS 9시 뉴스 전 화면에도 전경이 실려 여러 사람에게 축하 전화를 받았다.
대수선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오래되고 낡은 것은 싹 밀어 버리고 신축이 더 낫지 않느냐는 질문을 듣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물리적 사용’ 연한이 임박한 건축물이 다른 국가에 비해 많이 남아 있다.
기대수명을 다해 가는 건축물들이 대거 눈에 띈다.
이는 곧 건축물의 철거와 신축에 따른 ‘환경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는 뜻이다.
매년 쏟아져 나오는 건설 폐기물로 인해 환경문제가 심각하다.
고통받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도, 기존 건축물을 부활시키는 대수선 작업에 앞장서고 싶다.
디자이너로서 노후화된 건축물을 지정학적 발전과 사용 목적에 따라 복원하여 되살리고자 이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